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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평화센터 2008-01-13 13:49:14 | 조회 : 21568
제      목  평택미군기지의 역사(미군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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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p Humpleys와 Osan Air Base의 홈페이지에서 부대역사를 번역해놓습니다.
필요하신분은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번역엔 전교조평택지회선생님께서 수고해주셨습니다.
송탄에 있으면서도 오산기지라 이름붙인 이유와 미국의 전략적유연성에 대한 인정, 캠프험프리의 유래등은 눈여겨볼만합니다.

1. Osan Air Base(홈페이지 osan.af.mil)
오산공군기지는 대한민국에서 미공군에 의해 운영되어지는 두 개의 주요공군시설중 하나이자 한국전쟁중 오로지 미공군에 의해서만 설계되고 건설되어진 한반도내 유일한 기지이다. 오산기지는 명칭이 유래하게된 오산리마을 남서쪽 4.7마일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에서 20마일정도 남쪽에 위치한다. 1950년 북한공산군에 의한 남한침공이전에 이 지역은 언덕근처에 몇 개의 농촌소부락과 진위천을 따라 엄청 큰 논들로 구성되어있었으나 지금은 활주로가 놓여있다. 1200년 이상 묵은 국보인 커다란 은행나무가 농촌마을 중 하나가 자리잡았던 조그만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나무는 현재 기지내 골프장 4번홀에 여전히 서있다.
오산공군기지는 또한 1951년 2월 7일 있었던 ‘고지 육박전’의 그 장소이기도 하며 산 180번지와 그주위엔 공군전술지휘센터사령부와 51전투편대의 본부가 지금은 자리잡고 있다. ‘고지육박전’은 미8군의 썬더볼트작전중 발생하였다. 루이스 밀렛은 그 지휘하의 27보병사단 ‘이지’중대원들의 육박전돌격을 이끌어 수를 알 수 없이 많은 중공군에 대항하여 고지 정상을 점할 수 있었다. ‘이지’중대는 중공군을 대파했으며 밀렛대위는 의회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전투의 영향으로 중공군은 38선 북측으로 쫓겨났으며 결과적으로 한반도에 제5공군전술전투부대가 복귀하였다. 한편, 항공비행단 공병대는 제트전투기를 보조할 수 있는 공군기지를 건설하기위해 남한지역을 조사하였다. 공병대는 오산리남서쪽 지역을 후보지로 결정하고 1951년 11월에 확정지었다. 이 기지는 원래 오산리공군기지로 이름지어졌다 (그리고 한국전때부터 이지역 k55비행장이란 명칭으로 여전히 언급된다) 오산리란 이름은 실용적이유로 선택되었다. 오산리는 당시 대다수 군사지도에 명시된 유일한 마을이름이었으며 또한 발음하기가 쉬웠다. 항공공병대는 공군기지 보조시설과 제반시설들을 1952년초에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952년 7월 9일 기술진은 비행기 활주로, 유도로와 격납경사로등을 깔기 시작했다. 그러나 몬순지방같은 우기가 논을 메꾸고 비행장건설을 시작하려는 초기노력에 방해가 되었다. 이런한 지연은 공병대로 하여금 8월부터 하루 24시간 일주일내내 일하게끔 강요했다. 3개항공공병대대가 오산 제839, 840, 841공군기지를 건설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공병대는 9000피트에 달하는 8인치두께의 콘크리트활주로를 두달반만에 완성했다. 유도로가 또한 완성되고 격납경사로가 거의 완공즈음하여 1952년 12월 26일 제18전투-폭격비행단과 하나의 F-51전투비행중대가 도착하였다.
그후 얼마안가 나머지 두 개의 F-51전투비행중대가 도착했으며 비행단은 F-86F로 개종되었다.
1953년 2월 제18전투-폭격비행단은 오산리공군기지에서부터 제공된 장악임무비행을 시작했으며 그 임무는 남은 한국전동안 계속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서명된 휴전협정 때문에 제18전투폭격비행단은 1954년 11월까지 방어목적으로 오산리에 남아있는다. 한편 방어계획은 이전 제5공군사령부를 서울대로부터 서울 용산으로 이전할것이 요구되었다. 이 계획은 변경되었으며 1954년 1월에 사령부는 오산리 공군기지로 다시 자리잡게 되었으며, 오산기지가 한국에서의 미공군력의 중심축으로서 확정되어진다. 휴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했을때 미공군은 한 전술전투비행단을 제외한 모든 비행단을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1954년 11월 제314공군사단이 오산리공군기지에 있던 제5공군이전사령부를 대신하게 된다.
제58전투폭격비행단은 1955년 3월 대구공군기지에서 오산리공군기지로 이전하고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주둔임무를 띈 전술전투비행단이 된다. 1956년 9월 18일 공군기지는 현재의 명칭인 오산공군기지로 개명되어진다. 1958년 7월 미공군은 제58전투폭격단을 예비부대로 재편한다. 이맘때 아이젠하워행정부는 핵무기확산억제전략을 공표했다. 그리하여 오산공군기지는 지대지전술미사일작전의 주요기지가 된다. 이와함께 공군 제5단은 극동기지와 미 본토에서 오산과 군산공군기지로 전투비행단의 순환배치하므로서 이런전략을 보강하였다.
한국이 지속적으로 한국공군을 조련하고 장비를 갖추는 동안 한국방위를 지원하게끔 비록 지대지미사일이 1962년에 재배치되긴 하였지만 전투기배치는 1960년대전반에 걸쳐 계속되었다.
다른 무엇보다 1959년 활주로 대대적 보수공사가 오산기지를 여전히 한국전쟁중 정평있는 시설물과 제반기반으로 남게했다. 이런상태는 1968년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1968년 1월 23일 북한의 미함정 푸에블로호의 공격과 선원들을 인질로 삼은 것은 오산기지에 군대배치를 촉진시켰으며 그배치에는 1968년 1월말부터 3월에 이르기까지 650만파운드의 군수물자와 1000명의 추가인원의 도착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런위기상황은 미군주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건설재원의 투입을 이끌었다. 안보를 강화하고 현존하는 시설물들을 개선하고 오산기지에서 발생하는 많아진 주요작전을 후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투입된 재원에는 비행기격납고와 새 관제탑 건설비도 포함되어있었다. 비록 푸에블로호 위기상황은 1968년 12월 23일 선원들의 석방으로 무마되었지만 전투기부대배치는 기본전략으로 되었다.
1969년 4월 15일 북한은 또다시 긴장의 시기의 빌미를 제공했다. 북한이 한반도 동해위 공해선상을 비행중이던 미해군소속 ec-121기를 격추시켰을때 미국의 대응은 한반도에 또다른 전투기부대의 증강이었고 결과적으로 주둔임무를 띈 전투기부대를 한국으로 되돌려보내는 단계를 맞게된다.
전반적으로 이시기에는 미공군은 베트남전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이 남베트남과 태국에서 점차적으로 철수하던 때였기에 태평양미공군은 부대편성을 재배치했다. 이 재배치는 남한에서의 미공군역할에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1971년 3월 전술전투비행단이 군산공군기지에서 현역화되었다. 오산공군기지에는 1971년 11월 1일 태평양미공군이 제51공군부대가 오산기지에 주둔부대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2주후인 1971년 11월 13일 제3전술전투비행단의 제36전술비행중대가 오산기지로 이전하였다.
1974년까지 미군의 남베트남완전철수는 오산기지의 또다른 주요변화를 가져왔다.
1974년 9월 30일 제51공군부대는 제51구성부대로 명칭이 바뀌었고, 제36전술전투중대의 F-4O/ES와 제19전술공군후원비행중대의 OV-10AS를 관리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오산기지가 한반도에서 20여개 미공군활동의 중추적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오산기지는 1970년대동안 시설과 제반기반에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비록 많은 한국전쟁동안의 주요시설들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새숙소가 건설되어졌고 새사령본부단지가 제314AD부대와 제51CD부대를 위해 1974년에 완성되었다. 이 사령본부단지는 3년전에 화재로 손실된 71개의 반달형막사를 대신하는것 1979년과 1980년 영내거주 가족숙소와 부수적인 공동체보조시설들을 건설한것은 오산기지에 안정성이란 빌미를 제공하였다.
1978년 연합부대 사령부설립은 더욱 오산기지의 장래를 결정하였다. 한국에서의 미공군연합사령부임무의 진화된 역할은 1986년 9월 8일 제7공군부대 사령부의 활성화를 이끌었다. 미공군구성사령부로서 제314AD부대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1980년대 오산기지의 건설은 주로 임무변화와 증강 그리고 북한의 위협에 의해 지시되어진다. 1988년 F-16의 도입은 강화 비행격납고와 새로운 영내 군수품창고건설과 무인숙소의 업그레이드를 이끌었다. 오산기지의 표면이 40년묵은 한국전당시의 주요시설들을 서서히 변해가는 동안 오산기지는 군사적건설 프로그램계획이 전혀없는 긴 기간을 경험해야했다. 하지만 국방비이외의 다른 재원확보가 영애장교에게 공동체시설들을 추가하는 것을 허락했다. 1993년 10월 제25전투비행중대와 1994년 12월 페트리어트미사일포대의 도착은 또한 어떤 새로운 건축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이런 사건들 보다도 기지지휘관들은 근본적으로 영내시설보호 개선에 집중했다. 북한의 중거리용 유도탄인 스커드미사일위협 때문에 활주로 연내 보수작업은 오직 오산기지의 노후화를 입증하기위해서만 실시되어졌다. 왜냐면 1990년대동안 기지의 구조적외양에는 간소한 변화만 목격되었기 때문에 1998년 이후에야 태평양공군부대사령부가 기지내 보조시설 개선에 새로이 강조했다. 증가하는 기본 제반시설의 노후와는 제51전투비행단이 억제임무수행하는데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다. 태평양공군사령부는 결과적으로 오산기지에 한국재건발기란 이름아래 기금을 제공했다. 2억불이상이 다음 여섯해에 거쳐 수도, 하수, 전기배관 시스템의 교체및 보수를 위해 투자되어진다. 게다가 오산기지 중장기계획들이 오산기지의 극적인 변화를 예견케했다. 이계획들은 새 영내거주자 가족숙소, 새공동채 보조시설과 제51전투비행단의 임무수행을 보조할 많은 산업시설들을 교체를 포함하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까지 남한의 군사력이 성장했고 만만치 않은 군대로 성숙하였기 때문에 양국정치, 군사지도자들은 한반도 주둔미군의 역할에 대해 재검토하고 있었다. 뉴욕 쌍둥이 빌딩의 911테러공격과 동시에 일어난 미국 전략정책의 주된변화는 세계적 미군의 군사적실행과 기지화에 변신을 요구했다. 군은 고정적이고 수비형태의 군대에서 민첩하고 즉각 대응가능한 부대형태를 채택해야만 했다. 그 일환으로 한국내 미군부대들은 어떻게해야 무기체계의 기술적 진보가 인원수경감시키는 반면 남한군대는 국가주권을 옹호하는데 보다 많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연구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서 미국과 한국정부간의 2002년도 LPP(연합토지관리계획/국토동반자계획)과 2003년도 안전보장정책발의로 알려진 괄목할만한 협약이 탄생하였다. 이러한 결정들은 한국주둔미군들의 역할과 임무의 재정립을 반영하였으며 재정립은 2011년까지 오산공군기지의 중요한 재정립과 성장을 예견한다.

2. 캠프 험프리
어떻게 우리 미군이 현재 이장소에 오게 되었는가?
1919년 평택비행장은 일본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한국전쟁동안 평택비행장은 K6이라 불리웠다. 공수부대와 제614전술통제그룹을 수용하기위해 미공군에 의해 수리되어지고 증강된 이후로 1962년 K6는 제4수송중대 CWO벤자민 험프리를 기리기위하여 캠프 험프리라 다시 불리우게 된다. 험프리는 헬기사고로 사망한 인물이다.
1964년 험프리지역사령부는(후에 제23지역 후속부대로 다시 개명하는데)모든 직접적 후원을 제공하는 미8군의 파견주둔사령부로서 활동하게 된다. 즉 보급과 유지 한국내 모든 전통적 군수물자의 저장 : 공격발포, 위생병훈련, 미8군우유공장을 위한 사령부
1974년 제19후속보충여단의 출범으로 캠프험프리는 미군수비대 캠프험프리로 개명된다.
미군수비대 캠프험프리는 캠프내 주둔하는 인사화 관련된 모든 일에 여전히 근본적인 책임이 있지만 제19보충사령부는 8군사령부에 절대 필요한 모든 보조활동에 책임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제23직속보충대에 보고되는 그런 사안만이 대구에 있는 제19보충사령부에 보고되었다. 미군수비대 험프리에선 오로지 기본적 기능만 남았다. 나중에 제23직속보충대와 제19보충대는 제23보충대와 제19씨어터 군사지역사령부로 개명되었다.
1996년 6월 17일 미군사 보충활동지역3으로 설정되었고 캠프험프리, 캠프롱, 캠프이글 그리고 수원비행장에 속한 단위부대들의 평시 보충임무를 책임두었다.
[원문]
OSAN AIR BASE HISTORY

Osan Air Base is one of two major airfields operated by the U.S. Air Force i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only base on the peninsula entirely planned and built by the U.S. Air Force during the Korean War. The base is located 4.7 miles southwest of the town of Osan-Ni, for which the base was named, and about 20 miles south of Seoul, the capital city of the ROK. Prior to the invasion of the ROK by the North Korean communists in 1950, the area consisted of several small farming villages near the hillsides and a large number of rice paddies along the Chin Wi River where the runway now lies.

A large ginko tree, more than 1,200 years old and a national treasure, is situated on a small hill where one of these villages was located, and still stands on the number four hole of the base golf course.

Osan AB also was the site of the "Battle of Bayonet Hill" on Feb. 7, 1951, on and around Hill 180 where the Air Component Command's Hardened Tactical Air Control Center and the headquarters of the 51st Fighter Wing are currently located. The battle took place during the U.S. Eighth Army's Operation Thunderbolt. Capt. Lewis Millet led a bayonet charge of his "Easy" company of soldiers from the 27th Infantry Division up the hill against an unknown number of Chinese Communist Forces ensconced on its crest. "Easy" Company routed the CCF, and Captain Millett received the Congressional Medal of Honor.

Subsequent to the battle, the CCF were driven back north of the 38th parallel, and resulted in the return of Fifth Air Force tactical fighter units to peninsula. Aviation engineers, meanwhile, surveyed locations in the ROK to build an air base capable of supporting jet fighters. They decided upon the area southwest of Osan-Ni. Established in November 1951, the base originally was named Osan-Ni AB (and still referred to by its "K-55" airfield designation from the Korean War). The name "Osan-Ni" was chosen for practical reasons--it was the only village shown on most military maps of the time, and it was easy to pronounce.

Aviation engineers began construction of base support facilities and infrastructure early in 1952. On July 9, 1952, engineers started work to lay the airfield's runway, taxiway and parking ramps. Monsoon-type rains, though, impeded initial efforts to fill the rice paddies and begin airfield construction. The delay forced engineers to work 24 hours a day, seven days a week beginning in August. Three engineer aviation battalions were assigned the task of building Osan - the 839th, 840th, and 841st EABs. They completed laying a 9,000-foot, 8-inch thick concrete runway in 2½ months. With the taxiway also completed, and parking ramps nearing completion, the 18th Fighter-Bomber Wing and one of its F-51 combat squadrons arrived on Dec. 26, 1952. With the wing's other two squadrons arriving shortly thereafter, the wing converted to the F-86F.

In February 1953, the 18th FBW began flying air superiority missions from Osan-Ni AB which continued through the remainder of the Korean War.

With the Armistice Agreement signed on July 27, 1953, the 18th FBW remained at Osan-Ni AB for defensive purposes until November 1954. Meanwhile, plans called for HQ Fifth Air Force (Advance) to move from Seoul National University to Yongsan Garrison in Seoul. This plan was changed, and in January 1954, the headquarters relocated to Osan-Ni AB, and established the base as the major hub of operations for U.S. air power in the ROK.

As the Armistice took hold, the U.S. Air Force redeployed all but one tactical fighter wing from the peninsula, and in November 1954, the 314th Air Division replaced Fifth Air Force's advanced headquarters at Osan-Ni AB. The 58th FBW moved from Taegu AB to Osan-Ni AB in March 1955, and became the only permanently-assigned tactical fighter wing on the peninsula. On Sept. 18, 1956, the base was redesignated Osan AB--its current name. In July 1958, the U.S. Air Force inactivated the 58th FBW. At this time, the Eisenhower Administration promulgated a nuclear deterrence strategy. Osan AB thus became the main base of operations for air-to-ground Matador tactical missiles. Concurrently, Fifth Air Force complemented this strategy by instituting rotational deployments of fighter aircraft units to Osan and Kunsan ABs from its Far East bases and the U.S. to bolster the defense of the Republic of Korea as it steadily trained and equipped the ROK Air Force. Although the Matador missiles were relocated in 1962, fighter deployments continued throughout the 1960s.

Other than a major reconstruction of the runway in 1959, the base still retained its Korean War-vintage facilities and infrastructure. This condition changed modestly beginning in 1968.

The North Korean attack on the USS Pueblo and seizure of its crew on Jan. 23, 1968, precipitated deployments of forces to Osan AB that included the arrival of 6,500,000 pounds of cargo and 1,000 additional personnel from late January to March 1968. The crisis underscored the importance of the installation, and led to infusion of construction funds to enhance security, improve existing facilities, and build new structures to support the significant increase of operations occurring at the base. These included construction of aircraft shelters and a new control tower.

Although the Pueblo crisis subsided with the crew's release in on Dec. 23, 1968, fighter unit deployments occurred on a regular basis. On April 15, 1969, the North Koreans again triggered a period of tension when it shot down a U.S. Navy EC-121 flying in international airspace over the East Sea of the Korean peninsula. Response by the U.S. resulted in another increase of fighter forces on the peninsula, and eventually set the stage for return of permanently-assigned fighter units to the ROK.

Throughout this period, the U.S. Air Force had been deeply committed to the Vietnam conflict. However, as the U.S. withdrew incrementally from South Vietnam and Thailand, Pacific Air Forces repositioned its force structure which led to substantial changes for the U.S. Air Force on the ROK. On March 15, 1971, the 3rd Tactical Fighter Wing was activated at Kunsan AB. At Osan AB, PACAF activated the 51st Air Base Wing to assume host-unit responsibilities at Osan AB on Nov. 1, 1971. Two weeks later, on Nov. 13, 1971, the 3rd TFW's 36th Tactical Fighter Squadron moved to Osan AB.

Total withdrawal of U.S. forces from South Vietnam by 1974 resulted in another important change for Osan AB. On Sept. 30, 1974, the 51st ABW was redesignated as the 51st Composite Wing (Tactical), and assigned the 36th TFS with its F-4D/Es and 19th Tactical Air Support Squadron with its OV-10As.

With Osan AB serving as the nucleus for more than 20 U.S. Air Force activities on the peninsula, it experienced a period of facility and infrastructure changes during the 1970s. Although many of the Korea-War vintage structures remained, new dormitories were built, and a new headquarters complex completed in 1974 for the 314th AD and 51st CW(T) replaced 71 Quonset huts that were destroyed by fire three years earlier. In 1979 and 1980, construction of on-base family housing and additional community-support facilities gave the base a sign of stability.
Establishment of the Combined Forces Command in 1978 further set the future of Osan AB. The evolving role of U.S. Air Force's CFC mission in the ROK led to activation of Headquarters Seventh Air Force on Sept. 8, 1986. It replaced the 314th AD as the U.S. Air Force component command.

Construction on Osan AB during the 1980s was dictated largely by mission changes and enhancements, and the threat from North Korea. Introduction of the F-16 in 1988 led to construction of hardened aircraft shelters, a new on-base munitions storage area, and upgrades to unaccompanied personnel housing.

While the face of Osan AB slowly changed in replacing its 40-year-old Korean War-vintage structures, the base experienced a lengthy period with little or no military construction program projects. However, other funding sources allowed base officials to add community-type facilities. Arrival of the 25th Fighter Squadron and its A/OA-10s in October 1993 and a Patriot missile battery in December 1994 also necessitated some new construction. Other than these events, base officials primarily concentrated on improvements in facility protection due to the threat from North Korea's reliance on medium-range SCUD missiles. Annual runway repairs furthermore only attested to the aging of Osan AB as the base witnessed only modest changes in its structural appearance during the 1990s.

It was not until 1998 that HQ PACAF renewed emphasis on improving the base's support structure. Increasing infrastructure failures seriously detracted the 51st Fighter Wing from conducting its deterrence mission. HQ PACAF subsequently provided the base with funds under the "Fix Korea Initiative." More than $200 million was invested in upgrading or replacing the water, sewage and electrical distribution systems over the following six years. Additionally, mid- and long-range plans for the base foresaw a dramatic facelift of Osan AB that included new on-base family housing, new community-support facilities, and replacement of many industrial structures that supported the 51st FW mission.

As the ROK's military grew and matured into a formidable force by the late 1990s, political and military leaders from both countries reexamined the role of U.S. forces based on the peninsula. A major change in U.S. strategic policy coinciding with the "9-11" terrorist attack on the Twin Towers in New York required a "transformation" of global U.S. military commitments and basing. The military had to adapt from a fixed, in-garrison-type force to a mobile, responsive force. For its part, U.S. Forces in Korea studied how technological advances in weaponry could mitigate a reduction in personnel while the ROK military forces carried out an increasing role to protect its sovereignty. The result of this effort led to the landmark agreement known as the Land Partnership Plan in 2002 and the Security Policy Initiative in 2003 between the U.S. and the ROK governments. These decisions reflected a realignment in the roles and missions of USFK that forecast a significant reshaping and growth at Osan AB through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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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istory of USAG Humphreys & Area III

Or how we came to be the place we are...
In 1919 the Pyongtaek Airfield was constructed by the Japanese.  During the Korean War, Pyeongtaek Airfield was called K-6 after being repaired and enhanced by the U.S. Air force to accommodate a Marine Air Group and the 614th Tactical control Group.  In 1962 it was renamed Camp Humphreys in honor of CW0 Benjamin K. Humphreys, 4th Transportation Company, who died in a helicopter accident.  In 1964 Humphreys District command (later re-designated as the 23rd direct support Group) was activated as a separate installation command of the Eighth U.S. Army providing all direct support; supply and maintenance; storage of all conventional ammunition in Korea; Ag publications and training aides and the Eighth Army Milk Plant.  In 1974 with the activation of the 19th Support Brigade, Camp Humphreys was re-designated as U.S. Army Garrison, Camp Humphreys.  USAG-Humphreys was still basically responsible for all affairs affecting personnel stationed at Camp Humphreys, but the 19th Support Command was responsible for all support activities vital to the Eighty Army command.  Those units formerly reporting to the 23rd Direct Support Group reported to the 19th Support Command in Daegu.  Only the basic functions remained with USAG Humphreys.  Later, the 23rd Direct Support Group and 19th Support were renamed 23rd Support Group and 19th Theater Army Area Command.  On 17 June 1996 the United States Army Support Activity Area III (USASA Area III) was established and made responsible for the peacetime support mission for Camp Humphreys, Camp Long, Camp Eagle and units assigned to Suwon Air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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